예수교회 스베덴보리

2]예수교회와 새교회

한강건너검은돌 2025. 1. 14. 15:41

1]  이정선 목사 미국 새교회 신학교 유학-  예수교회 한강 예배당


*이정선 목사 정인보 목사 정전 후 1955년 미국 매서추세츠 제네럴 컨벤션= 보스턴 새교회라고도 함

새예루살렘의 교회 총회(The General Convention of the Church of New Jerusalem)

새교회 신학교 (The New Church Theological School ) 유학

 

신학교에서 하버드 대학 석사 과정 배려/ 유학 도중 2년 만에 귀국한 사정...

1950년대 한국은 3년 간 전쟁을 겪은 최빈국, 

교회는 예배당이 없어져 가정집에서 20 여 명 모이는 형편.

 

(해방 후 월남하여 흑석1동 도당재에 있던 구 일본 신사 건물 매입 예수교회  한강 예배당 개척

이정선 복음사 1950년 한국 신학교 졸업. 예수교회 목사 안수 받음(선도감 이호빈 목사)

전쟁 중에 건물이 파괴되고(전쟁 중 제주도 부산으로 피란, 중앙신학교 제주 부산으로 이동)

그 언덕은 정전 후 국군의 날 대통령 에어쇼 관람대로 사용(10월 1일은 서울 시청 광장에서

기념식- 사열 분열 행진

10월 2일은 한강 상공에서 공군 에어 쇼- 용산구 이촌동 한강 다리와 서빙고 사이 모래사장에

북한군 진지를 만들고 항공기들이 동쪽 상공에서 날아와 폭격하고 공수부대가 낙하하여

적군을 소탕하는 행사- 노량진 본동 고지대  흑석동에 서울 시민들이 몰려와 구경 人山人海)

그 아래  공터는 김석원 장군이 육탄 십용사 현충비와 학도 의용군 현충비 건립

그 터를 찾을 수 없게 되어 이조근 집사 2층 일본식 집에서 모인  것.

 

*1955년 국군의 날 현충일 제정, 

동작동= 당시는 흑석2동에 국군묘지 (현충원의 옛 이름) 조성..... 

54년 착공 55년 7월 설치 57년 준공

노량진- 묘지 앞 도로 아스팔트 포장 공사하는 것 구경

국민학교 소풍지/ 주일학교 야외 예배 50년대 기억

 

담임 목사 유학 비용을 일부라도 부담할 만한 교인이 없었고

부친 이조근 집사의 사정 역시 어려운 상태인데 부인 우보영 사모가  중병으로 고생

강단을 박선관 박승걸 두 분에게 부탁하였으나 강단을 비우고 장기 유학을 하는 것도 불안

미국에서 석사 박사 코스를 이수하려면 장기 체류하며 공부를 해야 하는데 포기하고 귀국.....

*귀국 후 동국대학 철학 석사  70년 영국 명예철학박사 필리핀 명예 신학박사

 

2]  박선관 집사는 이호빈 목사와 중학 동창,

예수교회 순안 예배당이 그 집에서 시작(그 후 차두행 복음사 담임)

일정 말기 이호빈 목사가 신사참배 창씨개명 등 황국신민회 정책을 따르지 아니한

불령선인으로 몰려 감시 당하며 선도감으로 활동하기 어려운 때 

박재봉 목사 한준명 목사 이종현 복음사 유붕열 복음사 이조근 집사.  김지영  집사 박선관 집사

김희학 복음사 한의정 복음사들이  교단과 교회를 돌보았다.

1940년 <예수 >지 발행인이 박선관으로 나옴-그것도 41년 봄 폐간(한글 신문 잡지 폐간.일어상용 강제)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하는 기간 조선 땅의 조선인(일본은 內地. 한국은 半島= 반도인 조선인)들도

전쟁에 동원되었다.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운 시기-

1945년 8월 15일 패전한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하였다

 

해방 후 조만식 장로 이윤영 목사 조선민주당  창당 33인 상임 중앙위원  중

이호빈 이종현 박선관 전영택 

신탁 통치 반대하여  소련 군정 지명 수배  월남

(이호빈 목사는 중앙신학교 설립.

이종현 씨는 대한민국 정부 강원도지사 농림부장관 국회의원

전영택 목사는 미군정 참여-전영택 목사는 감리교회 목사

, 월남한 당원들의 조선민주당 재건은 실패)

*박선관 집사는 이정선 씨 한국 신학교 학생 때 스웨덴볽 신학서를 읽으라고 권한 분,

 

박승걸 집사는 1931년 이른 가을 원산에 와 선배 한준명 전도사와 함께 스웨덴볽을 읽은 분

백남주 한준명 박승걸 3인 32년 7월 중순 <새생명의 길> 제작  발행

33년 9월 9일 원산 예배당 개천식(백남주 목사)

같은 날 문천 예배당 개천식(박승걸 이용준 전영기 복음사)

9월 10일 송천 예배당 덕원군(한준명 신치정 복음사)

 

*이정선 목사 미국 유학 시 박승걸 집사 장남은 하버드 대학생이었고-고등학생 때 한강 예배당 출석

나 보다 세살 정도 연상인 차남은 60년대 초까지 한강 예배당 출석

 

*원산 한준명 목사는  해방 후 월남하지 않고 원산에서 사역.

38도선으로 남북 분단 북한은 소련 군정  급속도로 공산주의 세상이 되었고

월남하지 못한 기독교 교역자 교인들은 체포 징역 유배 처형 당하였다.

교회 말살의 정점은 6.25 전쟁이었다.

한준명 목사는 1950년  6월 30일 정치보위부에 피체

원산 와우동 교화소에   수감 한국군이 원산시를 탈환하기 전 10월 9일 300여 명 집단 처형장에서 생환

원산 신풍리 시민 학살(순교자 조희렴 목사 김충순 장로 이광재 신부 김봉식 신부)

12월 흥남 철수 작전 미군이 제공한 피란선을 타고 월남

1951~53년 중앙신학교 부산 분교/53~62년 부산 연희대학교 여자 초급대학  조교수 교수 

1963년 상경 중앙신학교 학감 겸 교목 

 

3] 한준명 목사와 이정선 목사와 인연

1932년 11월 초순 평양 기도단 집화 강사 한준명 전도사

장소 이종현 씨 경영하는 신행상회에서 시작 산정현 장로교회 당회원 중지 요청

장별리 이조근 집사 집으로 이동 본격적 은사 집회  장로교는  降神 행사로 보고

평양노회 임시노회 열어 이용도 백남주 한준명 조회

기림리 교회 담임 김경삼 목사 정직 처분

(이정선 목사는 당시 8살 보통학교 2년생- 그 집회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와 재봉틀 위에서

새우잠 자고 학교에 갔다.  33년 1월  2일 원산 명석동 한준명 전도사 집에서 저녁  집회

3일 새벽  3시 원산 광석동 백남주 선생 집에서 집회 참석. 부모 따라 원산에 간 것)

 

 

이정선 우보영 결혼식 주례(한준명 목사 월남하여 이정선 우보영  결혼식 주례 제주읍에서)

 

모친 이유신 집사 부친 이조근 집사 장례 집례

이유신 집사님 돌아가셨을 때 내가 한준명 목사님께 연락

당시 이정선 목사 기독교 사회 단체 활동을 하여 장례식이 쓸쓸하지 않았음

도미 전 3월 

부친 이조근 집사님은 이정선 목사 강남 사회복지학교 교장 재직 시 별세

이정선 목사 대학 승격 노력-  교장 연임하지 않고 미국에 가서 뉴욕 교회 담임

(이유신  이조근  두 분 장례 준비 일체를 나의 부친이 맡아 하심)

#한준명 목사...이기봉 집사 송봉애 집사 김유순 집사 장례 예배 집례

 

4] 미국 유학 전 1955년  이정선 목사  <예수> 지 복간호 발행. 필경 등사판
그 때에도 慕光學會라는 이름 사용 발행처는 예수교회 중앙 선도원

1957년. 귀국한 후 타자 등사판으로 62년 11호 종간?
모광학회 회보 형태로 연 1회 발행 

주보 <예수교회> 발행 1962-66년
구성.... 주일 설교/.성경공부- 미국 새교회 Worcester목사 저 <Sower Note>에서 
구약 신약 번역 연재 .주일 저녁 성경공부/교회 소식 및 알리는 말씀

*200원 연보하면 연보자 이름으로 주보 발행..당시 교인들이 200원
연보하는 것도 힘들어 하는 빈곤한 형편(화폐 개혁으로 2000환을 200원으로 변경)
*필자 예수교회 주보는 복사판으로 소장

1961년-62년 어린이 주일학교 교재 제작 주일학교 어린이 가르침
(1961년 교재에 스위든볽 선생. 새교회. 이용도 목사, 예수교회가 있었음
1962년도 교재는 좀더 짜임새 있는 성경 교재였는데 필경 등사판. 분실)

1962년 미국 새교회의 신앙고백을 번역하여 주보에 게재

우리의 신앙은 1962년 1월 3일 예배 순서에 처음 등장. 

 처음에는 개역 한글 성경 문체 ~ 하나이다 식으로 작성

후에 현대 국문=새번역 성경 문체로 바꿈

매주 사용한 것은 아니고 1월 3일 예수교회 성탄절에 사용하다

1967년 {새교회 한국연합회}라는 교단을 표방하면서 정착되고

그 후 공식 신앙고백으로 채택한 것이다

 

현재 서울 광주 인천

그리고 우리 교회와 신앙적 교리적 노선을 공감 공유하는 교회에서 사용한다.

[서울 강서구 화곡동 소재 예수교회 제일예배당 주보 표지에 우리의 신앙이

인쇄되어 있다]


1964년 예수교회 한강 예배당 중앙 선도원 간판을 예수교회 SWEDENBORG(IAN)
이라고 지역 예배당 명칭을 빼고 예수교회라는 작은 간판을 걸었다

*예수교회 중앙선도원, 예수교회  한강 예배당 현판  걸고 10년

그러나 중앙선도원이 예수교회의 행정 선교 교욱 본부로서 기능이 약화

무명 교단은 하루 아침에 문을 닫아도 누가 관심 가지고 도와 줄 상황도 아니었다.

 

1965년 옆집으로 이사하여 1층 방 셋 청년교인들 살림 방으로

2층은  다다미를 깔아 신 벗고 앉아 예배 드리고
아크릴로 간판 주문 제작 한글로 예수교회 영문으로
CHURCH OF THE NEW JERUSALEM으로 걸었다.

 

*이정선 목사 60년대 초 중앙신학교 교수 사임

교회가 너무 작고 가난하여 목사 월급을 지급할 형편이 못 되어 자비량 목회,

보이스카웃 연맹 사무총장, 서울 간호 전문학교 외래 교수

60년대 중반 업무 기획 추진 능력이 알려져 기독교 시민 단체 사무총장 활동

당시 외국 여행이 어려운 시대- 일본 대만 홍콩 필리핀 기독교인 대회 참석,

외국 여행의 길이 열려 미국 새교회 총회에 참석할  수 있었던 것이다.

 

 

5]  예수교회와 새교회 한국 연합회(1967~1982년)


1) 1967년 이정선 목사 미국 새교회 총회 참석, 한국 총리사 아시아 선교 책임자기 되어 귀국
2) 67년 10월 한국 새교회 신학원 개강..원장 이정선 목사 
교수 한준명 목사..새교회 구약개론
정인보 목사...스위든볽 신학 계시록 영해 등
이정선 목사.새교회 신학개론 및 기독교 현대 신학

시인 이상로 외래 교수-국어 문학
신학생 7-10명  명수대 이원재 목사. 수원 김창식 선생도 청강.
3)1968년 여름 서울 임마누엘 수도원 세미나..일본 도이 요네조 목사 부부 참석.
4)1970년 새교회 200주년 세계 대회 영국 런던에서 개최..이정선 우보영 부부 한국 대표
5)1971년 6월 새교회 신학원 제1기 졸업식..졸업자 이영근 씨.

(71년 봄 용산구 갈월동 용산중고 입구 건너편 쌍굴다리 근처 4층 건물로 이전

이영근 목사 안수식도 그곳에서 시행/*1971년 가을 이정선 목사 도미 이영근 목사 승계)

72년 용산구 남영동 성남극장 파출소 골목 남영의원 지하층 임대

73년 영등포구 화곡동 단독주택 구입(목사 이영근 복음사 조순희)

6) 이정선 목사 도미..정인보 목사 새교회 대표자가 되어 신학원 제2기 75-78년

졸업자 3인 목사 안수
7)염리동 새교회,(곽진평 선생) 방배동 정금마을 새예루살렘 교회 개척(정인보 목사)
*무등산 도행기도원. 임마누엘 수도원...신학 강좌 개최.
8)새교회날 기념 집회 서울 화곡동 예수교회 제일 예배당 81년 6월
방배동 새예루살렘의교회와 연합 예배 정인보 목사 설교
9) 서울 강서구  화곡 4동 예배당 신축, 교회 이름을 예수교회 제일 예배당으로 정함

10) 1983년 예수교회 공의회에서 함께 일하자는 요청을 받아 전 교인 총회에서 공의회 가입 결정

(담임 이영근 목사)

*예수교회 공의회 74년 이호빈 목사 선도감, 박영주 목사 부감

83년 의장 박영주 목사 별세 이호빈 목사 의장으로 재추대- 윤도한 장로 김희방 목사 부의장


6] *서울 광주  두 교회가 규모가 작은 교회로 대중집회는 하지 못하고..[경비 인원 부족]
적은 수 관심 있는 교역자 교인들이 모여 강좌 수양회를 하였다.
문서 전도라고 해 봤자 누런 시험지에 등사한  교지를 냈다.
스위든볽=스베덴보리 도서는 번역 책이 거의 없었고
교계의 인식도 호의적이지 않아 기독교 서점 이단 종말론 코너에
정인보 목사 천국과 지옥 강흥수 목사의 책이 몇 권 진열되었을 정도

그 시절에 비하면 무척 발전한 것이다,.
예수교회 예수인 출판사에서 스베덴보리 신학전집 번역 발간[이영근 목사]

 

새교회에서 여러  가지 책을 발간하고 있다
정인보 목사 번역도 재출간

(현 한국 새교회는 미국 펜실배니아 브린아신
The General Church of the  New Jerusalem이 총회.
신학원을 운영하여 졸업자 목사 안수는 미국 감독과 아시아 선교  책임자가
방한하여 은평구 녹번동 서울 새교회에서 거행)

 

7] [필자 개인의 추억]

 

a)1967년 신학원이 흑석동 예배당에서 개강

교재 겸 교지 <純正 基督敎> 월 1회 발행, 필경 명수대 예수교회 이원재 목사

등사는  신학원생- 이정선 목사의 새교회 신학 개론, 한준명 목사의 새교회 구약 개론  연재

1년 정도 발행

b) 1968년 여름 암마누엘 수도원에서 신학 세미나  장로교 감리교 교역자 장로  30여 인 참석
일본 동경 새교회 도이 요네조 목사 부부 초빙 강사,
내가 하루 참석하여 사진 촬영 참석자 전체는 찍지 않음. 박승걸 장로 참석
50년대 이정선 목사 미국 유학 시 설교 차 가족이 온 것 기억합니다.
 
 

 c)1970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새교회 200 주년 세계 대회 참석하고 돌아온 이정선 목사님

<순정기독교> 52주 공과(영문)  우보영 사모님이 먹지 대고 타이핑

그것을 청년들이 읽고 발표- 청년회원들이 모두 신학생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천국과 지옥> <신애와 신지> <신령 섭리> < 4대 교리> <순정 기독교>를 대학생 시절 읽었습니다.

*순정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공부는 주일 오후

영국에서 만든 순정기독교 52주 공과를 이해하기 위해 상 하 권을 독파

그러나 얼마나 이해하였는지..영어 공부한다고 생각하며 읽었으니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

그 때 나는 20대 대학생 청년회원이었습니다.

 

[私談]그 시절 한국의 영어 교육은 회화는 없었고 (외국인 교사도 없었고  테이프 동영상도 없었음)

문법과 독해 위주(유명한 영문법 책=메들리 삼위일체).중학교 3학년 때 종로 모 학원에 가서

안현필 영어 실력 기초 수강-수강생 중학생은 나  한 사람

한 달 듣고 돈이 없어 포기(수강료 월 250원)

그런데 그 때 열심을 내서 중고등학교 시절 영어 성적은 우등생이었지요

영어영문과 학생은 아니어도 영문으로 된 글을 읽게 된 것은 그래도 구식 교육 덕입니다,,

나는 외국인 특히 영어 사용하는 미국인과 만나 대화할 기회가 없는 학과 국어 교육과 학생

*재수 할 때 영어회화  학원 -영상은 없었고 이어폰으로 영어 대화를 듣고 따르는 Lab시스템

그것도 돈이 없어

한 달 하고 그만 두었는데 강사가 소질 있다고 칭찬

외신 기자 사회인 대학원생들이 모인 free talking은 어려웠는데

영어로 나오는 외국 영화는 어느 정도 알아 들었습니다. 꾸준히 하였으면

영어과를 갈 수도 있었을까 하하 다 지난 이야기입니다.

*미국 새교회 여신도 흑석동 교회 방문 목사님이 저 학생이 스위든볽 신학서를

번역할 청년이라고 소개, 한국 교회 청년이 많아 희망적이다 하였는데

아 그것도 1960년대 후반기  이야기입니다.

대학생 때 학교 어학 시험도 성적 우수자.. 토플이니 토익이니 하는 시험은 없었고 필답고사,   

고 3 모의고사 국어 영어는 전교 등수[ 아 난 수포자 수학 과학은 열등생- 지금도 나는 이공계 존경]

국 영 수 세 과목 모의고사 성적 우수자 발표에는 들지 못하고 반에서도 1등은 포기

당시는 본교사 시절이었음

 

d) 주일 예배 동생과 흑석동에서 출발  비가 많이 내려 삼각지에 물이 불었는에 어쩼든,

  버스가 다른 길로 돌아 교회를 가기는 하였습니다

목사님 미국 가신다고 발표하는 날 비가 억수같이 내려 처연 悽然하였습니다.

 

e)갈월동 시절 버스 타고 가는데 교회 간판 예수교회 중 하나가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는데

예/수/ 교/ 회 네 개를 벽에 붙인 것인데 그 중 하나가 

전 날 비바람 때문에 떨어진 것 같은데 사람이 다치지 않아 다행이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울 간호  전문학교 현성윤 교수(독일어 담당 목사)를 따라 간호학교 학생  출석

흑석동 청년회원 중고등부 학생회원 주일학교는 4주 셋방 우리집에서 모이다가 해산

2025.1. 14 화